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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음미일기

20211210 식은 찌개밥 [01:27]

출근 전부터 오늘 할 일에 추가했던 '블로그 시작하기'.

퇴근 후 샤워를 마치고 책상에 앉아 1시간 만에 블로그를 개설했다. 

 

여느 때와 같이 오늘도 "오늘은 야식을 먹지 말고 바로 자야지.."라고 생각했지만 블로그 이미지를 고르다 위스키를 한 잔 마셔버렸다.

 

술은 긴장감의 끈을 느슨하게 풀어주지만 그만큼 자제력의 끈 또한 풀어준다. 덕분에 한 잔이 아닌 2번째 잔을 방금 나는 따랐다.

짭짤하게 소금간이 되어있는 구운 아몬드를 먹자니 식욕이 돋아 결국 밥을 먹어야겠다 마음을 바꿨다. 아버지는 곧 주무실 거고 주방에서 가스불을 켜자니 소리가 여간 시끄러울 것 같다. 잠귀에 예민하신 아버지를 뒤에 두고 주방에서 북적거리는 소리를 내고 싶지 않아 식은 김치찌개에 밥을 말아먹기로 마음을 먹었다. 

 

찌개는 모두 알고있듯 '짠 국물'이다. 그리고 대게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알고 있듯 염분은 극저온을 제외한 차가운 온도에서 더 도드라진다(이 이유로 뜨거운 음식을 실제로는 더 짜게 먹게 되는 경향이 있다). 여하튼 차가운 상태로 먹으면 참 덜 맛있는 음식 중 하나가 찌개인데.. 나의 미식의 기준은 아버지를 깨우지 않음에 확신을 두었다. 대신 밥의 온도를 이용해 찌개를 덥히고, 또 충분한 시간을 이용해 기다려 온도 감에서 비롯되는 짠맛과 국물과 밥알의 괴리감을 줄이고자 했다. 그냥 글 쓰는 동안 찌개에 말아둔 밥을 불게 내버려두는 것이다.

 

밥을 말고 글을 쓰다보니 15분이 지났다. 섞어보니 국물은 거의 보이지 않고 섞는 내내 찌걱찌걱한 전분의 농도 감이 들린다. 한 입 입에 넣어보니 미지근하지만 제법 온도가 올라왔다. 찌개 속 삼겹살의 비계가 차가워 걱정이었는데 제법 비계의 식감이 느껴진다. 고춧가루의 매운맛이 도드라진다. "캅사이신은 알코올로 씻어내야 효과가 좋잖아!"라는 핑계로 위스키를 한 모금 더 넘긴다. 이 글을 쓰는 내내 이 찌개 밥은 더 온도가 높아지겠지. 캅사이신은 온도 감을 더 높게 느끼게 해 주기 때문에 지금 같은 상황에서 내 혀가 이 찌개를 맵게 느끼면 느낄수록 같은 온도 대비 더 뜨겁게 느낄 것이다. 덕분에 나는 매울수록 이 미지근한 찌개 밥을 더 온도 감 있게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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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를 지향하다보면 이에 대한 집중으로 인해 시야가 좁아져 주변을 잊게 될 때가 있다. 대가라는 측면으로 봤을 때 무엇이 정답이라 할 수 없는 게 세상의 일이다. 우리는 짧다면 짧고, 또 길다면 긴 숫자 간의 길이 같은 삶을 산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목적은 중요하지만 그 과정이 외로운 길이 아닌지를 곱씹으려 한다. 찌개는 끓여 먹어야 분명 더 맛있는 음식이다. 그래도 오늘 내 선택은 식은 상태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을 가능한 잘 즐기고 싶어 노력했다. 그리고 나는 아주 만족했다. 요즘 나의 미식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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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것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늦은 시간 먹는 것을 가능한 지양해야 한다는 걸 참 많이 느낀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소화력의 벽을 느끼기에 주어진 삶에 펼쳐질 식도락을 소화하지 못할까 염려가 있다. 과유불급의 교훈을 계속 입에 머금고 오늘의 일기도, 야식도 마무리를 해야겠다.

 

마지막에 먹으려고 남겨둔 비계가 많은 부위가 기대보다 풍미를 많이 느끼게 해주어 기분이 참 좋다!